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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스데이 북.

최근 수년간 국내 SF출판의 화두는 '최신 SF'였다. 수십년 묵은 '고전 명작'일색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바로 지금'(이래봐야 최근 십수년이지만)인기를 끈 새로운 작품들이 속속 소개되어 '올해의 SF'류의 단편선도 세권이나 나왔고(어째 단발성으로 그친듯 하지만) 그리폰 북스, 행복한 책읽기 SF총서에서도 수편의 최신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던 이런 경향은 내겐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굳이 의의를 두자면 '모든 창작물의 98%는 쓰레기다'라는 법칙이 충실히 적용되고 있음을 재확인했을 뿐. '살아남은 2%'들인 고전SF들에 비하면 아직 세월의 검증을 받지 않은 최신 SF들은 그만큼 98%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일단 SF라면 웬만해서는 꾸준히 구입하는 고정수요자인 나도 이젠 SF는 그만 접을때가 된건가 싶을 정도였으니.(결국 이 주제로 글을 쓰다가 그만뒀지만)

한데 코니 윌리스의 '둠스데이 북'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2%에 속하는' 최신SF였다. 이전작품으로 역사 연구를 위한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공유한 화재 감시원, 개는 말할것도 없고, 둘 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대(각각 1940년의 런던,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데다 화자가 과거의 인물들을 보는 따뜻한 시선.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늘어지지 않게 끌어가는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다.

둠스데이 북은 이 두 작품보다 더욱 강렬했다. 배경 자체는 내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시대였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긴장감은 전작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코니 윌리스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초반이 좀 늘어지는 편인데(특히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늘어지는 초반 때문에 1년 반을 서가에서 썩었다. 일단 초반을 넘기고 나서는 그날 밤에 다 읽었지만.) 초반부를 무난히 넘기는데다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마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비창의 3악장을 듣는 것처럼, 파멸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는듯한 긴장감과 박진감은 전작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예전에 비창을 들을때는 3악장을 저렇게 느꼈었는데, 한 2년만에 다시 들었더니 또 인상이 다르다. 이래서 음악이 재밋는거겠지만 :) 원래는 사나흘 정도에 걸쳐 아껴가며 볼 생각이었는데, 결국 밤을 새서 한번에 읽어버리고 말았으니. (아깝다~)


요즘 인터넷 서점에서는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내용 까발리기를 장려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책의 성격에 따라서는 유용한 정보가 되겠지만, 또 많은 경우엔 '범인은 XXX!' 수준의 소개아닌 소개가 되기 십상이다. (아쉽게도 내용을 밝혀야 서평이 된다고 생각하는 독자나 기자들이 아직 많은 것 같다. 하기사 내용을 밝히지 않은 서평은 이 글처럼 좀 허전하게 느껴지기 십상이지만.)

'둠스데이 북'의 경우는 이를 읽지 않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편이 훨씬 더 깊이있게 몰입할 수 있을 책이다.(저자만 보고 바로 카트에 집어넣은 덕분에 나도 그 위험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 그러니 SF팬이라면 고민 말고 구입하시길.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책이다. 장담한다.

B군 | | 관련글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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